[전영민의 별책부록] "장하다, 내 아들 송민섭!"

 가정형편이 풍족하지 못해 글러브 하나 사주지 못한 일을 두고 “가슴속의 한”이라고 했다. 신고선수로 입단해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던 아들이 직접 주사기로 고름을 뺀 일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생애 첫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은 KT 창단멤버 송민섭(30)의 모친 유경화(56)씨는 “엄마들은 다 그렇겠지만 미안한 일만 기억에 남아요”고 글썽였다.

 

▲“엄마, 저는 왜 글러브 안 사주세요.”

 

 초등학생 송민섭은 4학년 때까지 수영 선수반에서 ‘안산의 물개’를 꿈꿨다. 진학을 앞두고 모친 유 씨가 취미로 야구를 제안했다. 앞서 야구부 생활을 시작한 친형 송명섭이 매일 집합하고, 야단맞는 모습에 고민하던 송민섭은 5학년 진학과 동시에 안산 리틀야구단서 글러브를 잡았다.

 

 유 씨는 “그때의 제안이 아직도 마음에 남는다”고 했다. 취미를 붙인 송민섭은 일취월장했다. 진로를 위해 서울로 전학한 뒤로도 송민섭은 매년 자리를 확고히 했고, 주장 완장까지 찼다. 그런데 부친 사업이 어려워졌다. 글러브 하나도 넉넉하지 못했다. “왜 저는 글러브 안 사주세요”라는 송민섭의 한 마디는 아직도 유 씨의 마음에 흉터로 남아있다.

 

 유 씨는 “큰 애 때는 집안이 힘들지 않았지만 민섭이 운동을 시킬 때는 사업이 힘들어 용품이나 여러 가지 지원을 해주지 못했다”면서 “그래서 초등학교부터 총무를 맡아 항상 민섭이와 같이 출근해 아주머니들과 야구부에 밥을 해줬다. 지금도 아들을 보면 미안한 감정이 앞선다”고 했다. 유 씨는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린 뒤에야 마음을 추슬렀다.

▲‘오징어게임’과 신용카드

 

 송민섭은 KT판 오징어게임의 최후 생존자다. 고등학교 졸업 후 신인드래프트서 낙방한 그는 단국대 졸업반이던 지난 2013년 가을 신생팀 KT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최종 22명에 이름을 올려 신고선수(현 육성선수)로 KT 유니폼을 입었다.

 

 프로생활을 시작했지만 주머니에는 동전 하나 없었다. 그래서 유 씨는 신용카드를 내어줬다. 동료 사이에서 괜히 기죽지 말라는 뜻이었다. 송민섭은 마음을 더 독하게 먹었다. 아픈 내색을 보이면 쫓겨날까 하는 마음에 주사기로 직접 발바닥에 찬 고름을 빼냈다. 2년 뒤 21명이 팀을 떠났고, 송민섭은 유일하게 생존했다.

 

 유 씨는 “민섭이가 어느 날 다리를 절뚝이면서 집에 와 ‘살아남으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고 하더라, 손바닥이며 발바닥이며 아주 난장판이었다”며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언젠가는 되겠지 싶다가도 보기가 참 힘들었다. 밤에 약을 발라주는데 계속 눈물이 났다”고 회상했다. 유 씨는 당시 카드 내역서에 담긴 알뜰한 아들의 모습에 눈물을 흘렸다.

 

▲“민섭아, 치고 달려!”

 

 송민섭이 1군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뒤로 유 씨는 매년 144경기를 시청했다. 송민섭이 주로 경기 후반부 대주자나 대수비로 출전해 끝까지 TV 앞을 지킨다. 간혹 선발 출전하는 날에는 저녁 식사도 거른다.

 

 올해는 붙박이였다. 송민섭은 단 한 번도 2군으로 내려가지 않고 시즌 내내 1군에 몸담았다. 그래서 연출한 명장면은 모두 유 씨의 기억 속에 확연하다. 유 씨는 “1위 결정전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민섭이가 잡고 환호하면서 홈플레이트로 달려오더라, 내 품에 안기는 것 같아서 심장이 떨렸다”고 말했다.

 

 한국시리즈 역시 직관이다. 아들이 뛰는 모습만 봐도 감개무량이다. 유 씨는 “이제 야구가 아니면 사는 게 재미가 없다. 야구 보는 게 낙이고 하이라이트 보는 게 하루의 마무리”라며 “민섭이뿐 아니라 어릴 때부터 같이 고생한 친구들이 환호하는 모습이 어떨까 상상을 해봤다.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서 꼭 그 장면을 한국시리즈에서 보고 싶다”고 말했다. 유 씨는 우승반지를 찬 아들과 저녁 식사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사진=KT위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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