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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 총재(왼쪽)와 한학자 여사의 성혼식. |
문 총재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결혼을 해야만 했다. 그 결혼은 참가정의 출발이요 인류의 참부모가 등장하는 의식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인해 참가정을 이 땅에 뿌리내리지 못했다. 재림 메시아는 참가정을 세워 참부모로서 구원섭리를 펼쳐 나가야 한다.
문 총재의 성혼에는 이러한 각별한 의미가 있다. 통일교는 이날을 참부모의 날로 제정해 기념하고 있다.
문 총재의 성혼을 시작으로 제자들의 결혼식이 곧 바로 진행됐다. 통일교의 결혼의식은 단순한 남녀간의 결합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순결한 혈통을 찾아 세우고 참사랑의 인연을 맺는 그야말로 ‘축복’의 날이다. 그래서 통일교의 결혼식을 ‘축복’ 또는 ‘축복결혼’이라고 부른다. 축복결혼의 또 다른 특징은 문선명·한학자 총재 내외의 주례하에 ‘합동’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통일교의 최초 합동결혼식은 36쌍(가정)이 참가해 이루어졌다. 이후 72쌍, 124쌍, 430쌍, 777쌍, 1800쌍, 6000쌍, 6500쌍, 3만쌍, 36만쌍으로 확대되면서 국경·종교·인종을 초월하는 대표적인 통일교 행사로 널리 알려졌다.
1966년에는 ‘원리해설’을 강의하기 쉽도록 재구성한 ‘원리강론’이 간행됐다. 이를 계기로 체계적인 교리 강의 및 수련이 가능해져 통일교 교세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원리강론은 통일교 교리의 집약된 경전으로서, 궁극적으로는 문선명 총재가 재림주임을 증거하고 있다.
협회 창립 20여년 만인 1974년 처음으로 통일교를 상징하는 A타입 교회가 지어졌다. 이를 모델로 해 전국적으로 A타입 교회 건설 붐이 일었다.
교회 개척기임에도 문 총재는 먼 미래를 내다보고 국위선양을 할 수 있는 무용단으로 선화어린이무용단(후일 리틀엔젤스) 창단했다. 리틀엔젤스는 1965년 미국 공연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세계를 누비며 한국의 아름다운 전통을 선보이고 있다. ‘통일교’ 하면 ‘리틀엔젤스’를 떠올릴 정도로 리틀엔젤스는 통일교의 아이콘이 되었다.
1966년 전국대학원리연구회(CARP)가 발족됐다. “앞으로 대학가에 크게 관심을 가져 갈 길을 못 찾고 방황하는 대학생을 일깨우고 규합하는 일에 노력하라”는 문총재의 말이 동기가 되었다. 카프는 그 후 대학가에 동아리로 등록해 대학생 전도의 전위단체로 활동했으며, 두익사상(하나님주의)을 내걸고 운동권 학생들과 치열한 사상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1970년대는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적 차원에서 통일운동(Unification Movement)의 불길이 타오른 시기였다. 문 총재는 1972년 초 도미, 1973년 영주권을 얻으면서 안정적으로 미국에 머무르며 교세를 확산시켜 나갔다.
통일교는 뉴욕 벨베디아(2만6천여평)에 활동본부를 마련한 데 이어 뉴요커호텔을 사들여 세계선교본부로 사용할 정도로 경제적인 기반도 탄탄해졌다. 통일원리에 감화된 미국의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 꽃을 팔고 일본의 신자들이 인삼과 도장, 도자기(다보탑·석가탑)를 팔아 마련한 돈은 이처럼 세계구원을 위한 원대한 일에 쓰였다.
문 총재는 한국을 아담(아버지)국가, 일본을 해와(어머니)국가, 미국을 천사장(장자)국가로 부르며 각각 책임과 역할을 달리했다. 일본은 무엇보다 통일교가 세운 섭리기관(국제승공연합·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통일사상연구원·국제기독학생연합회 등)과 단체(세계문화체육대전 조직위원회·세계평화교수협의회·초교파종교협의회·향토학교·피스컵 대회조직위원회) 등, 언론사, 대학교가 정상적으로 자리잡도록 재정적으로 지원해야 할 책임이 있었으며, 문 총재는 일본 신자들의 그러한 노고를 항상 잊지 않았다.
한국 통일교의 성장은 1960년 1차 7년 노정 선포 이래 1980년(3차 7년 노정)까지 눈에 띄는 성장세를 탔다. 반면 기성교회의 반대도 그 만큼 치열해졌다. 개신교단 차원에서 통일교를 이단으로 정죄해 ‘집안단속’을 했고, 가톨릭도 통일교와 선의든 악의든 접촉 자체를 불허했다.
이 가운데 통일교 대학생 단체인 전국대학원리연구회(CARP)는 주요 대학에 기숙형 학사를 세워 대학생 전도에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뒀다. 카프는 통일가의 지도자를 배출해내는 산파역할을 했다. 1970년대는 통일교의 교세가 공격적으로 전개된 만큼 기성교회의 반대운동도 반작용처럼 일어났던 시기였다. 1973년부터 본격화된 승공사상교육을 통해서도 통일교와 인연이 된 사람이 늘었다.
일본 통일교는 전도 최전방 역할을 한 비디오센터를 활용해 우수 인재를 대거 교회로 흡수했다. 일본은 교회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헌신신도’들을 중심으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미국에서의 교회 성장은 대규모 대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미국 70개 도시를 돌며 순회강연을 했다. 30만명이 운집한 워싱턴 모뉴먼트 대집회(1975년)는 미국 선교의 최대 하이라이트였다. 문 총재는 ‘미국은 하나님의 소망’ 등의 강연으로 미국의 도덕적 각성과 메시아를 맞아야 하는 미국의 사명을 촉구했다.
국내에선 1975년 6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1백만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구국세계대회를 개최해 교세를 과시했다.
강민영 기자 mykang@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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