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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145.5x97cm paper collage |
처음 임진강의 불타는 황혼을 뒤로하고 창고형으로 되어 있는 일산의 작업실을 들어섰을 때 스튜디오 그 자체만으로도 느낄 수 있는 오랜 시간의 고뇌가 있었다. 60평 남짓한 비교적 넓은 공간 한 구석에는 풀기가 가시지 않은 다양한 색상들의 책들이 다음 작업의 언어로 사용될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고, 700여점은 될 것이라는 크고 작은 작업들이 빼곡히 1-2층의 계단 사이로 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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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145.5x112cm paper collage |
적지 않은 공간이지만 한 부분들은 마치 분업화된 생산라인의 다면들 같았다. 폐기된 책이나 종이를 모아 한 곳에 정리고 , 풀과 아교처리를 하는 공간, 건조하는 공간, 제작 공간 등이 10년간 한 곳에 머물렀다는 작업실 구석구석에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회화를 전공한 작가의 작업실이라기보다는 '종이노도'의 현장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그리기를 접고 난 후 변화한 이승오이 작업실 변모이다.
그는 먼저 오래된 잡지, 교과서 등의 책이나 종이폐품 등을 수집한 후 본드성분의 액체에 책이나 종이들을 담그게 된다. 다음에는 본드성분이 배인 종이들을 건조대에 올려 말리게 되는데 어느 경우는 6개월이 걸리는 지질도 있다. 상당 시간동안 건조하게 되면서 책이나 종이들은 이미 교과서나 잡지 등의 기능으로부터 단지 조형적인 매재(媒材, medium)로서의 의미로 변화된다. 이 같은 사전작업을 거친 후에 많은 책이나 종이들은 단단히 고체화되어 이를 잘라 화면에 붙여나가면서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된다.
그의 작업은 1997년 종로갤러리 전시의 새로운 실험에서 지금의 종이시리즈가 시작된다. 졸업 후 교직생활을 하게 된 이승오는 당시 새로운 실험에 목말라하던 30대를 지나면서 무기력한 생활의 반복을 탈피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친다. 종로 갤러리 개인전에서는 책을 이용한 설치작업을 시도했으나 작업의 내용보다는 오히려 책이나 종이 그 자체의 물성에 대하여 반응이 긍정적으로 나타났다.
이 전시를 계기로 책과 종이를 이용한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되고, 다양한 제작 방법에 대하여 고심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인연으로 본격적인 종이를 고체화하여, 색체를 투여하고, 붙이고 쌓아가는 '집적(집적)시리즈'에 돌입하게 되며 적(績)으로 명명된 초기 작업들은 대체적으로 종이를 쌓아간다는 행위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후 흡사 폐기물들이 한곳에 정크 되어있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의 집적된 다양한 종이 단면들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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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족 45×38㎝ |
당시 초기 작업에서는 특별한 메시지를 응축한 도구로서 보다는 새로운 방법론에 대한 의미를 제시하는 정도에 그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정한 패턴이 반복된 집적과 형태의 새로운 질서로 이어지는 경향이 나타나고 이로부터 화훼나 풍경 등의 형상들이 화면에 선보이게 된다.
흐트러진 화면으로부터 새로운 질서의 언어를 부여한 그의 작업은 단지 종이의 물성에 대한 접근으로서만이 아닌 회화적 형상과 상징적 도구로서 화면에 정렬되기 시작한 것이다. 2002-2003년 경 민화를 새롭게 해석한 'Layer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이때부터 그의 조이는 파렛트와 붓 대신 활용되는 자신의 회화적 언어로 변화하였고, 관념적이거나 추상적 이미지를 벗어나 보다 구체적인 작가의 시각과 언어를 표현하는 질료로서 의미를 부여한다.
자개공예 등에서 입사(入絲)기법을 보이면서 강한 선의 가능성을 발견하였고 장인들이 사용한 분청사기 등의 선에서 회화가 갖지 못하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는 이승오의 평소 느낌들은 그려나가는 작업으로부터 쌓고 메워나가는 대단히 공예적인 과정을 거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회화적 언어를 획득해가는 작업을 시도하게 된다.
그의 작업을 대하게 되면 흡사 나무나 자개 대신 '종이 입사(入絲)기법을 '을 대하는 장인적 체취가 물씬 풍기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확실히 그의 작업은 평면에서 맛볼 수 없는 인내와 정세한 제작상의 밀도가 숨 쉬고 있다.
흡사 나뭇결이나 태고의 신비로부터 비롯된 지층의 역사 한 부분을 차용한 듯한 작가의 장인적 노력에 대한 감응은 그 매재가 책이라는 점에서 보다 이색적이다. 양식의 집합체라는 상징도 그러하지만 폐책자들을 이용한 그의 아이디어에 대한 설득력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주요 소재들을 살펴보면 종이작업 초기의 물성접근, 단순한 재료접근의 단계를 지나게 되고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의 작업들은 다시 전통색의 상징으로 꼽히는 오방색에 대한 관심을 쏟게 된다. 그러나 2004-2005년에 접어들면서 주제는 다시 현실로 회귀한다.
일상의 도시풍경이나 전원의 낮은 언덕, 작은 길 등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는 최근까지의 작업들은 거창한 관념이나 역사성 대신 보다 솔직한 근거리의 생활이 녹아있는 일상의 전경들이기도 하다. 더욱이 수없이 축적되는 종이작업에 더하여 황토로 나머지 공간들을 메꾸어가는 작업은 한 차원을 달리하는 흙냄새와 자연스러운 풍경화로서 화면을 정제한다.
세 번째의 변화로 이어지는 그의 '종이 결 풍경'들은 매우 독특한 채취가 있다. 처음 자개나 목공예, 도자공예에서 작가가 느꼈던 그 강렬한 맛과 인상들이 회화적인 현상으로 오버랩 되어 평면에서는 쉽게 맛보기 힘든 자연에 대한 입체적 연상을 가능케 한다. 물결치는 듯한 종이책들의 결과 그 결을 따라 쌓여지는 시간과 역사, 다시 문명의 체취까지도 포괄하는 의미는 이승오의 선택이 갖는 매력이기도 하다.
가상공간의 시대를 넘나들면서, 더군다나 첨단미디어의 현란한 차용과 매개가 일상화되어지는 이 시대는 '손의 힘'이 사라져 버린 듯한 착각이 일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돌연한 그의 출현은 이색적인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낮은 능선과 작은 길, 그야말로 작은 풍경들이 한 부류를 이루고 있다. 일산의 작업실을 오가면서 평소 소시민으로서 대해온 나지막한 언덕들과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이, 노적가리와 황토로 마무리한 논밭들, 모두가 생소하지 않은 풍경들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이 시리즈들은 향수가 있고, 전원의 평온한 서정이 있다.
두 번째로는 산수의 재해석이 있다. 대표적으로 대작 2점에서 볼 수 있는 겸재의 "금강전도"를 재해석하는 산수시리즈는 수묵산수화의 준법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수묵화의 선, 그 기운생동의 생명력을 갖는 먹 선에서 감동을 받았다는 그의 평소생각을 바탕에 두고 치밀한 수놓기와 같은 종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에서 그의 새로운 '종이산수화'가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이다.
방법의 차별화, 그 낯설게 하기의 신선함과 가능성을 확보한 이승오의 작업들은 민화나 전원풍경, 자연의 재해석 그리고 새로운 산수화의 독자성으로 정리할 수 있는 작업소재들로 진전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업 자체가 기예적 반복과 밀도를 요구하는 만큼 형식에 치우치기 쉬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 더군다나 형식의 전복이나 대안의 제시가 결국에는 작가가 말하려는 작업의 내용미학을 위한 과정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기존 형식의 틀로부터 독자적인 해체를 통하여 자신을 찾아 나선 만큼 이제는 쉼 없이 변화해가는 이 '시대의 화두'를 찾아나서는 선두주자로서의 보다 파격적인 관점과 선언이 요구된다. 급기야는 엽기적 작업들이 설득력을 갖을 정도로 충격적인 작업들까지 명멸하는 이 시대에 보다 거시적인 관점과 채널확보는 글로벌시대의 언어획득의 매우 중요한 요건이기도 하다.
글: 최병식(미술평론가, 경희대 교수)
정리:스포츠월드 권동철기자 kdc@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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