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기의 무예이야기]낳은 정과 기른 정

역도산·최 영·마에다 아키라 日격투기 3인방
한국이 낳아주고 일본이 길러준 상징적 인물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말은 자주 신문지상을 장식하곤 한다. 박찬호, 박세리 등 스포츠 스타들은 국제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고 한국인들의 자부심을 잘 북돋워준다. 격투기에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명사들이 있다. 레슬러 역도산, 극진카라테의 창시자 최영의 총재, 일본 이종격투기의 초석을 만든 공신 중 한명 마에다 아키라가 그들이다.
이 3명은 단지 격투기 선수로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격투기 역사에 한 획을 그었으며 새로운 사업을 창출한 사람들이다. 역도산은 패전한 전후 일본인들에게 희망을 준 사람이며 서양레슬러들을 일본인이 혼내준다는 공식은 이후 레슬링계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역도산은 일본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국사람들은 다 아는 한국인이다.
최영의 총재는 한때 일본 청소년이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을 정도로 일본사람들에게 사회적인 존경과 자부심을 가지게 한 인물이다. 최영의 총재를 만나본 사람들은 그의 형형한 눈빛과 무도가의 마음가짐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최영의 총재가 만든 극진카라테는 이전 가라테 경기와 달리 풀 컨텍트 방식이다.
상대의 몸에 직접 타격을 인정하는 극진카라테 경기는 싸움으로 악평을 받으면서 전통카라테계로부터 배척을 받았지만 이종격투기가 성행하는 지금은 오히려 글러브를 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통성’과 진부한 경기방식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최영의 총재가 전 세계를 유람하며 벌인 격투여행은 최영의 총재의 전설과 카리스마를 만드는데 공헌을 했으며 극진카라테의 명성은 이 고행에 절대적인 빚을 지고 있다. K-1을 시작한 이시이 관장이 차린 정도회관도 극진카라테의 한 분파이며 최영의 총재와 극진카라테의 영향이 없었다면 K-1은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마에다 아키라는 재일교포 3세다. 타인에 대한 호오가 심한 마에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없이 잘해주는 반면 적이 많은 전형적인 한국인의 성품을 지녔다.
이노키 문하에서 처음 레슬링을 시작한 마에다는 UWF라는 신생 레슬링 단체를 만들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80년대 프로레슬링의 명맥은 일본에서 유지되었다. 많은 경기방식과 흥행노하우가 발달을 했으며 자유로운 실험을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UWF는 부침을 거듭하다 해산되었지만 지금까지 회자되는 전설적인 경기가 많이 벌어졌다. UWF 이후 마에다는 프라이드 경기의 전신격인 링스라는 단체를 조직한다. 현재 프라이드 간판선수인 효도르와 노게이라도 이 당시 발굴한 선수였다.
그러나 흥행노하우는 K-1에, 선수는 프라이드에 뺏긴 채 링스는 해산을 했고 리어왕처럼 야인생활을 하던 마에다는 얼마 전 히어로스라는 종합격투기 대회를 만들고 K-1주최사인 FEG와 협력 중이다.
소문난 트러블 메이커인 마에다 때문에 FEG 다니가와 사장의 존재감이 점점 적게 느껴지는 탓에 언제까지 협력무드가 지속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원래 이합집산이 잦은 곳이 일본격투기 업계다.
이들 격투기 3인방은 다행히 조국에 대한 정체성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한국 사람들도 그들을 한국인으로 취급하고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가장 큰 아이러니는 그들을 키운 것이 일본과 일본의 무도 전통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한국에서 자랐다면 지금 어느 위치에 있을까. 인간이라는 외형과 잠재력이 똑같다면 중요한 것은 그것을 개발하고 채우는 소프트웨어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낳고 남이 키워주는 것을 즐기는 뻐꾸기 엄마처럼 우리는 그들이 일본에서 성공하자 한국인이라며 치하해 마지 않았다. 한국유도계의 학맥과 인맥의 벽을 넘지 못하고 일본으로 귀화한 추성훈을 일본국가대표로 선발한 일본인들은 과거사 왜곡과 신사참배로 비난받는 일본인들과 어떻게 다를까.
우리는 아직도 뻐꾸기 흉내 낼 기회를 엿보고 있다. 태권도 국제경기에서 외국인들이 자신의 실력대로 우승하고 한국에 귀화한 외국인이 유도 국가대표가 되는 날이 어서 빨리 와야 한다.

무예칼럼니스트 pagua69@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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