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4대 프로스포츠 중 하나인 배구는 최근 몇 년간 가파른 성장을 일궜다. 김연경이라는 월드스타의 존재와 함께 여자배구 올림픽 4강 신화가 두 번(2012 런던·2020 도쿄)이나 빚어지며 스포츠 팬들의 눈과 귀를 코트 위로 끌어모았다. 프로농구가 갖고 있던 겨울 인기 스포츠 타이틀까지 뺏어내며 배구인들의 행복한 비명이 이어지기도 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 배구계는 입을 모아 지금을 ‘위기’로 칭한다. 여자배구는 김연경이 태극마크를 내려두며 국제경쟁력 추락을 피하지 못했다. 김연경이 프로 은퇴까지 선언함에 따라 V리그는 당장 다음 시즌부터 슈퍼스타 없는 시즌을 마주한다. 일찌감치 옛 황금기에서 내려온 남자배구는 국제 경쟁력, 인기와 흥행 등 모든 면에서 회복세가 요원하다.
절체절명의 위기, 그 복판에서 대한배구협회를 이끌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안은 이가 있다. 2017년부터 지금까지 3번 연속 수장을 맡은 오한남 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숱한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어왔지만, 이번 3연임을 마주한 마음가짐은 남다르다. “이번이 회장으로 보낼 마지막 임기”라 선언한 그는 주어진 마지막 임무만큼은 꼭 성사시키고 바통을 내어주겠다는 각오를 되새기는 중이다.
◆마침표 앞에서 되새기는 초심
오 회장은 선수 출신 원로 배구인이다. 대신고와 명지대를 나와 육군보안사, 대한항공, 금성통신(현 KB손해보험) 등 실업팀에서 활약했다. 국가대표로도 뛰었던 그는 지도자 커리어도 밟았다. 1980년 한영여고 코치로 시작해 한일합섬 여자배구단을 이끌었다. 아랍에미리트(UAE) 클럽 알 알리로 향해 중동리그도 누볐고, 바레인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역임하는 등 다양한 이력을 쌓아왔다.
이후 중동에서 음식점, 호텔업에 종사하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성공적으로 제2의 인생에 뛰어들었지만, 피는 속일 수 없었다. 배구 행정에 뛰어든 배경이다. “어린 시절부터 배구로부터 배운 가르침과 수많은 배구인에게 받은 은혜를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는 당찬 마음가짐으로 2010년 서울시배구협회장, 2013년 한국대학배구연맹 회장 등을 맡았다. 그 끝에 지금의 대한배구협회장 오한남이 자리했다.

“어쩌다 보니 벌써 여기까지 왔다”는 그는 여자배구 3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 2020 도쿄 올림픽 4강, 국가대표 전인감독제 시행 및 외인 코칭스태프 구성 등 소기의 성과를 거둬 왔다. “운이 좋았다. 시기를 잘 타고난 듯하다”며 지은 미소에는 멋쩍은 감정도 포함됐다. 빚어낸 성과보다 한국 배구가 처한 냉혹한 현실이 크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3번째 임기를 맞아 “지금까지 이루지 못한 것들 그리고 당장 눈앞에 쌓인 과제가 눈에 밟힌다”고 마음을 다잡는 배경이다.
그는 “지난 8년간 배구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국제 경쟁력이 빠르게 회복되지 않아 어깨가 무겁다. 하지만 우리가 세운 배구 발전 로드맵에 따라 대표팀 경기력 향상을 최우선 과제로 두려 한다. 운영 시스템 재정비와 지원을 강화해 나갈 계획”이라며 “이제 더 이상 협회장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는다. 마지막을 맞아 한국 배구 위상 회복과 저변 확대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힘줘 말했다.
◆간절한 명예 회복
V리그를 마치고 찾아온 여름은 본격적인 국제대회 시즌이다. 남녀 대표팀 모두 각자의 우선 목표를 향해 구슬땀을 흘리는 중이다. 오 회장은 “여자팀의 경우에는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 잔류, 남자 대표팀은 오는 9월 필리핀 세계선수권 16강 진출이 최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선임한 외인 사령탑들의 본격적인 성과가 필요한 시즌이기도 하다. 오 회장은 “두 감독 모두 기대했던 대로 적극적인 소통을 통한 수평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덕분에 선수들도 코칭스태프와 높은 상호 신뢰를 쌓고 있다고 들었다”며 긍정적인 신호를 주시하는 중이다.
쉽지는 않다. 페르난도 모랄레스 감독이 이끄는 여자대표팀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2025 VNL 1주 차 예선에서 4전 전패를 당했다. 강등을 피하려면 대회에 참가한 18개국 중 꼴찌를 면해야 하지만, 벌써 가시밭길을 마주했다.
오 회장은 “이번에 강등당하면 다시 돌아오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세계 배구 주류에서 밀려나게 된다. 사활을 걸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어 “지난해 VNL에서 2승을 거두며 반전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았나. 선수들과 모랄레스 감독도 위기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고, 그걸 뚫어내겠다는 의지가 정말 강하다. 2주 차부터는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을 내놨다.

그의 메시지가 통했을까. 모랄레스호는 지난 18일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열린 2주 차 첫 경기, 캐나다전에서 짜릿한 풀세트 승리를 빚어내 대회 첫 승전보를 전했다. FIVB 랭킹 37위가 9위를 꺾어내는 대이변이었다. 특히 마지막 5세트에서는 1-6으로 출발한 열세를 딛고 15-13 점수를 뒤집는 저력까지 보여줬다. VNL 잔류를 향한 작은 빛을 볼 수 있는 한판이었다.
이사나예 라미레스 감독과 함께 하는 남자배구는 더 긍정적인 신호가 보인다. 오 회장은 “2024 제천 코리아컵에서 브라질, 호주, 중국 등을 이기고 1위를 차지했다. 최근 치른 유럽 강호 네덜란드와의 평가전에서도 1승1패로 가능성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경기력이 올라오고 선수들이 자신감을 찾고 있다. 상승기류를 이어가면 2028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출전권을 충분히 노려볼 수 있을 것”이라 진단했다.
◆아낌없는 지원
‘물심양면’을 마음에 새긴다.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국제 경기 수 확보, 해외 전지훈련 유치에 사활을 건다. 오 회장은 “정규대회만으로는 국제 경기 수가 부족하다. 지난해 제천 코리아컵이나 오는 8월 진주에서 열리는 2025 코리아인비테이셔널 등을 개최하는 이유다. 특히 남자대표팀은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브라질과 필리핀 전지훈련을 추진 중이다. 대회 현지 적응 훈련은 물론 평가전까지 진행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끝이 아니다. 지금의 지원이 성인 대표팀에만 머무르지 않게 하는 게 목표다. 오 회장은 “올해 U-21 남녀 세계선수권, U-19 남자 선수권에 각 연령 대표팀이 출전한다. 특히 U-16 아시아선수권대회에도 처음으로 남녀 대표팀 모두 나선다”며 “2023년 U-19 남자 세계선수권에서는 우리 대표팀이 3위에 오르기도 했다. 미래의 국가대표들이 단계적으로 성장해 한국 배구를 짊어지길 기대하고 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국제대회 출전을 위해 지원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지도자 육성에도 힘을 쏟는다. 오 회장은 “올해로 2년째 FIVB 코치 코스를 국내에서 개최하게 됐다. 지난해 시행한 레벨1에 더해 올해는 레벨2 코스도 개최한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의 전문성 강화와 국제화가 목표”라며 “이외에도 아마추어 코치들의 전미배구코치협회 배구 컨벤션 참가 지원, 지도자들의 일본 청소년 대표팀 합동 훈련 등도 시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텃밭 가꾸기
장기적인 선순환 시스템 구축이 필요한 때다. 배구계는 입을 모아 옅어지는 유소년 배구층이 지금의 위기를 자초했다고진단한다. 오 회장은 “전문 체육만으로는 종목 발전에 한계가 있다. 이를 위해 올해 협회는 배구 유소년 승강제리그를 도입해 발전적인 생태계를 마련하고자 한다. 승강제를 통한 클럽 활성화와 엘리트 발굴 및 육성을 목표로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수도권·중부권·남부권 등 총 12개 권역, 72개 리그로 나뉘어 승강제로 운영될 디비전리그를 통해 생활체육과 전문체육 연계 강화를 겨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를 통해 학교 배구부 선수 수급 문제를 완화하고 유소년 배구 인프라를 확장하는 게 가능해진다. 은퇴 선수의 지도자 활동 확대, 일자리 창출 등을 통해 배구 생태계 전반에 긍정적인 파급 효과를 불러올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오 회장은 “유소년 배구는 한국 배구의 미래다. 이번 시도를 통해 한국 배구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산업화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많은 분의 지속적인 관심과 응원이 필요한 때”라고 눈빛을 번뜩였다.

◆해피엔딩을 꿈꾸며
오 회장의 임기는 2029년 정기총회 전일까지다. 마지막 임기라고 못 박은 만큼 아름다운 퇴장을 위해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겠다는 의지다. 그는 “협회가 배구인들과 팬들로부터 신뢰와 사랑을 받는 조직으로 거듭나야 한다. 건강한 배구 문화를 조성하고 확산시키겠다”며 “LA 올림픽 출전권 획득이 그 시작이 돼야 한다. 내년에 있을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메달 획득으로 지난 항저우에서의 아쉬움도 털어낼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선수와 지도자 육성시스템 고도화, 배구 행정 및 외교전문 인력 양성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FIVB를 비롯한 국제스포츠단체와 적극적인 소통, 유대 강화로 한국 배구의 위상을 높여야 할 때”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협회장이기 전에 배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감이 막중하다. 이번 임기는 바통을 더 젊은 후배들에게 넘겨줄 준비를 하는 시기다. 이번 41대 임원 구성에도 이 점을 신경 썼다. 유능한 배구인들이 적극적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배구를 가꿀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메시지를 띄워 보냈다.
허행운 기자 lucky77@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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