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는, 그런 야구를 하고 싶습니다.”
KBO리그 10개 구단 중 한국시리즈(KS) 준우승이 없는 팀은 딱 하나, ‘호랑이 군단’ KIA다. 12번이나 닿은 꿈의 무대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았기 때문에 완성된 뜻깊은 타이틀이다. 철옹성 같은 KS 우승 확률 100%, 그 전설적인 숫자를 지켜낸 2024년의 KIA가 한몫을 단단히 했다. 그 중심에는 흔들리던 배의 타륜을 놓치지 않은 ‘초보 사령탑’ 이범호의 특별한 사명감과 리더십이 있어 가능했다.
◆고진감래
전임 감독이 비위행위에 휘말려 경질된 끝에 알린 출항이었다. 미래를 향한 축복보다는 엎질러진 물을 어떻게 닦을지 지켜보는 따가운 눈총이 많았다. 우승후보 1순위를 경력 없는 지도자가 이끄는 점에 대해서도 많은 이가 물음표를 찍었다.
가장 외로운 이는 감독 본인이었다. 하지만 10개월이 지난 지금, 의심과 불안의 안개는 온데간데없다. 7년 만에 빚어낸 통합우승으로 광주를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린 이 감독은 쏟아지는 축하와 헌사 속에 평생 잊지 못할 1년의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다.
광주에서 만난 그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꿈을 꿨다. 깨보니까 지금 이 자리”라며 미소 짓는다. 타이거즈 달력에 ‘V12’로 새겨진 지난달 28일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는 까닭이다. “좋은 꿈이었다. 한편으로는 조금 공허한 마음도 느껴진다. 바로 새 시즌 준비에 들어가다 보니까 ‘또 시작이구나’라는 생각도 든다. 1등이 아니고, 5강 밑으로 떨어졌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준비할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혼돈을 수습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던 동력을 물었다. 거침없이 “믿음, 신뢰”라는 단어를 꺼냈다. “선수들과 코치진 모두가 저를 믿어주셨다. 내가 하려는 야구가 누군가에게는 분명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내가 그걸 밀어붙이는 동안, 팀이 좋은 방향으로 변해갈 수 있다는 여지를 같이 발견한 게 아닌가 싶다. 그 믿음 속에서 함께 잘 달리다보니 이렇게 우승에 닿았다”고 웃었다.
◆이심전심
제아무리 ‘준비된 감독’이었다 한들, 수십 명의 선수들과 코치진을 이끌고 시즌을 헤쳐나가는 건 녹록지 않다. 감독 이범호의 첫 해, 가장 힘들었던 점을 묻자 “선수들과 관계를 쌓아가는 일이었다. 라인업에서 누굴 넣거나 빼고, 투수교체를 어느 타이밍에 어떻게 하는지가 참 어렵더라”며 “그때마다 ‘선수들이 과연 내 마음을 알아줄까’라는 걱정이 많았다. 그걸 알아야 상처받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고 돌아봤다.
답으로 택한 건 뻔하지만, 소통이었다. 이 감독은 “웬만하면 선수들과 직접 그리고 바로 이야기를 나눴다. 코치진을 거치면 오해나 불편한 상황이 생길 수 있다. 하루 이틀 미루다 보면 감정도 쌓이기 마련이다. 적어도 그날 경기 끝나고는 바로 불러서 직접 눈을 맞추려 했다. 감정의 찌꺼기가 남지 않게 노력했다”고 말했다.
모든 의사결정은 ‘선수’ 중심으로 돌아갔다. 더그아웃에서 감정표현을 최대한 자제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는 “잘할 때든 못할 때든, 감독 반응이 극단적으로 갈리면 선수들에게 좋을 게 없다. 나도 그랬지만, 선수들은 본능적으로 감독 눈치를 살핀다. 그때 제스처가 크면 ‘나 이제 어떡하지’라는 긴장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그걸 주고 싶지 않았다. 잘하든 못하든 ‘오케이’라는 마음으로, 우리 선수들이 심적으로 동요하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힘줘 말했다. 선수들이 시즌 내내 이 감독의 형님 리더십에 엄지를 치켜세운 이유였다.
◆다사다난
지나간 시즌, 행복만 가득했던 건 아니다. 14-1로 이기던 경기를 15-15 무승부로 마무리했던 6월25일 사직 롯데전, KBO리그 역대 최다 30실점 불명예를 안은 7월31일 광주 두산전은 올해 KIA의 대표적인 흑역사로 남기도 했다.
비판과 비난이 뒤섞인 팬들의 목소리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의연했다. “쓴소리는 몇 대 몇으로 지든 듣는 법이다. 오히려 그 2경기가 우리에게 중요하게 작용했다. 모두가 확실히 정신을 차린 계기였다. ‘방심하면 이런 의미 없는 순간을 맞닥뜨릴 수 있다’는 메시지가 있었기에 다시 집중할 수 있었다”고 돌아본다.
이어 “안 좋은 소리를 하려고 미팅을 소집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누가 봐도 잘못된 경기는 선수 본인들이 더 잘 안다. 그럴 때는 모아봤자 ‘나도 알아’ 식의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채찍이 필요할 때가 아니라 우리가 호흡을 다시 맞춰나가야 할 때 선수들을 만났다”는 지도 철학도 소개했다. “15-15 경기가 그랬다. 그때 미팅을 하면 우리가 힘을 받을 상황이라고 봤다. 선수들이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끔 만들어주고 싶었다”는 설명이었다.
시즌 내내 언행에 주의를 기울인 이유도 같다. 이 감독은 “속으로야 패배에 대한 핑계를 대고 싶은 적은 많다. 하지만 굳이 많은 말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선수들이 안 보는 것 같지만 기사를 통해 내가 하는 말을 다 지켜본다. 그래서 더더욱 ‘죄송하다. 그래도 우리 선수들 잘하고 있으니까 힘을 주십시오’라는 메시지를 싣고 싶었다. 팀이 다운되는 순간에 어떻게 하면 선수들을 뭉치게 할 수 있는지, 그걸 큰 틀로 잡고 움직였다”고 웃었다.
피땀 어린 노력으로 맛본 결실이다. 그는 “시즌 시작 전에 이 선수는 조금 모자랄 것 같다’, ‘이 선수는 이 정도까진 아닐 거야’ 했던 선수들이 다 성장해버리는 시즌이었다. 그걸 보는 게 참 즐거웠다. 감독으로서도 ‘아, 내가 추구하는 야구가 맞구나. 선수들이 더 달려갈 수 있게 도와줘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모로 얻은 게 많은 시즌”이라고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금상첨화
KIA가 이 감독에게 계약기간 3년 총액 26억원의 통 큰 재계약을 건넨 이유다. 내로라하는 선배 감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그에게 벌써 ‘명장’ 타이틀이 따라다닌다. 정작 본인은 손사래를 친다. “너무 이른 말이다. 저는 많은 선배들께 도전하는 입장”이라며 “아직 어떤 감독으로 일컬어지는지는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분들과 비교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저 제 나름의 철학으로 차근차근 해나가려 한다”고 바라본다.
그의 말마따나, 이 감독 본인과 KIA 모두 새 출발선에 섰다. ‘해태 왕조 부활’이라는 신규 과제도 짊어졌다. 쉽지는 않다. KIA 이름으로 첫 트로피를 든 2009년, 그리고 이 감독이 선수로 첫 우승을 수놓은 2017년에도 모두 그다음 해에 미끄러진 아픈 기억이 있다.
사령탑은 “2018년을 돌아보면 무조건 또 우승한다는 방심이 있었다. 이번에는 다르다. 그때에 비해 우리 팀은 더 젊고 강하다. 같은 실수는 없다”며 “나태해지면 안 된다. 핑계를 대는 순간 팀은 망가진다. 그간의 잘못과 약점을 인정하고 확실하게 움직여서 올해보다 내년의 KIA가 더 나아졌다는 이야기를 듣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힌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본인 리더십의 키워드를 물었다. 그는 “‘사람 마음을 다치게 하지 말자’가 슬로건이다. 마음이 다치면 회복에는 두 배의 공을 들여야 한다. 선수들이 상대가 감독이라고 아무 말도 못 하고, 나는 감독이니까 선수들에게 아무 말을 막 해도 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감독이기 때문에 내 선수들을 안아줘야 한다. 그렇게 돈독한 관계로 서로를 존중하는 야구를 만들고 싶다”고 눈을 번뜩였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건 바람이 아닌 햇빛이었다. 이 교훈을 떠올린 이 감독은 “누군가는 카리스마가 너무 부족한 건 아니냐고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저는 결국 그 방법이 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신뢰와 존중 속에서 얼마나 큰 시너지가 일어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다. 그게 내가 야구인으로서 살아가는, 살아갈 방법”이라는 당찬 메시지를 띄워 보냈다.
광주=허행운 기자 lucky77@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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