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기억법’ 주석태 “‘슬빵’ 이후 이렇게 욕 먹은 건 처음이에요” [스타★톡톡]

[스포츠월드=정가영 기자] 등장만으로 오싹했다. 외로워 보이지만 다가설 수 없는 서늘한 눈매로 스토커 문성호를 완성했다. 배우 주석태가 연기한 문성호는 그간의 악역을 모조리 갈아치운 ‘악역 끝판왕’이었다. 

 

최근 종영한 MBC 수목드라마 ‘그 남자의 기억법’은 과잉기억증후군으로 1년 365일 8760시간을 모조리 기억하는 앵커 이정훈(김동욱)과 열정을 다해 사는 라이징 스타 여하진(문가영)의 상처 극복 로맨스를 그렸다. 극 중 주석태가 연기한 문성호는 이정훈의 지난 연인이자 여하진의 친구였던 서연(이주빈)을 죽인 스토커다. 편의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서연을 보고 반해 자신과 사랑한다는 망상을 하다가 서연을 죽이고 만다. 징역을 선고받고 치료감호소에 갇혀있는 인물. 작품을 이끌어가는 악인(惡人)으로 눈도장을 톡톡히 찍었다. 

 

최근 전화 인터뷰를 통해 스포츠월드와 만난 주석태는 시원섭섭한 한숨을 내쉬며 “또 산 하나 넘었구나 생각이 든다”는 소감을 전했다. 악역이라 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진 않는다. 그래도 ‘그 남자의 기억법’ 문성호는 특히 시청자의 울분을 많이 산 작품이 됐다. 의도한 바도 있지만, 적절히 표현되었다는 만족감도 든다. 그는 “‘슬기로운 감빵생활’ 이후 이렇게 많은 욕을 먹은 건 처음”이라고 껄껄 웃으면서 ‘아, 아저씨 이제 좋은 역 하긴 글렀어요’라는 댓글이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주석태가 바라보는 문성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감독이 미리 귀띔한 서사에 따르면 문성호는 성공하지 못한 사진작가 지망생이었다. 생활비 마련을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서연을 만나게 된 인물. 그는 “‘지망생’이라는 건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야 데뷔할 수 있는 입장이다. 무명 생활이 길었던 나도 선택받지 못했을 때의 외로운 기분을 공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외로움이 문성호를 이해하는 시작점이었다. 

 

“무명 시절엔 1년 동안 오디션 한 번이 없었던 적도 있어요. 딱 한 신만을 바라보고 촬영장에 갔는데, 현장에서 신이 삭제된 적도 있었죠. 그때 홀로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화가 나기보단 외롭더라고요. 누구에게도 말 못 하는 감정이 들었죠. 그때 좋은 말씀을 해준 분들이 계세요. 그분들에 대한 감정은 지금 더 커졌어요. 문성호라는 인물이 서연을 보는 감정도 비슷할 것 같아요. 외롭고 힘든 삶을 살고 있을 때 처음으로 아무런 대가 없이 미소를 지어줬던 거죠. 그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커졌을 거라 생각해요.”

주석태는 마음껏 미움받고자 했다. 단순히 ‘싫다’가 아니라 징그럽고 미워했으면 하고 바랐다. 일부러 메이크업도 최소화했고, 머리 스타일도 최대한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 촬영에 임했다. 신뢰를 떨어트리기 위해 평소보다 높은 톤을 구사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서연을 침대에 묶고 억지로 반지를 끼워 넣는 신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고. 이 장면 속에 그가 의도한 건 기름진 머리를 쓸어 넘기는 행동이었다. 그 모습에 달린 ‘재수 없다’는 댓글을 보며 시청자의 미움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는 그다. 

 

이정훈과 정서연의 사랑, 그리고 여하진과의 사랑 모두 ‘빌런’ 문성호의 악행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주석태는 “4부 대본까지 보고 촬영에 들어갔다”며 “둘 사이를 방해하다 퇴장하는 인물 정도로 생각했다”고 돌아봤다. 초반에는 멜로와 코믹 신이 많았고 문성호가 이토록 비중 있게 그려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로맨스 중심으로 그려지면서도 스릴러 장르는 정말 스릴러답게 그려지면서 복합장르가 잘 표현됐다고 추켜세웠다. 

 

감정의 한계가 없길 바랐다. 끝도 없이 슬퍼하고 끝도 없이 웃고. 작품 속 문성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웃음소리를 내는 장면이 있는데, 원래 대본은 ‘서늘하게 미소 짓는다’라고 쓰여 있어요. 저는 거기서 조금 더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웃는 장면은 더 과하게, 살짝 보이는 눈물은 더 과하게 울었죠. 감정을 크게 크게 잡아갔어요.”

 

놀랍게도 스토커를 연기하기 위해 그가 그려낸 감정은 ‘멜로’였다. 문성호의 감정은 받아들이기 쉬웠다고 설명하며 “남들이 들으면 우스울지 몰라도 나는 서연이와 진한 멜로를 찍는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에게 오히려 이정훈이 ‘빌런’이었다.

 

“다른 작품을 보며 준비했어요. 영화 ‘세븐’(1995), ‘마담 싸이코’(2018), 그리고 ‘다크 나이트’(2008)의 히스레저도 참조했죠. 이들의 감정이나 표현을 조금씩 섞어나가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석태에게 없는 문성호의 여러 모습을 영화 속 인물을 통해 차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실제로 기름진 머리를 넘기는 장면도 히스레저를 보고 표현해봤죠.”

 

스토커의 숙명(?)으로 동료 배우들과 합을 맞추는 신이 많지 않았다. 외로운 인물을 연기하면서 진짜 외로움을 느껴야만 했다. 특히 치료감호소를 탈출하기 전 유리창을 바라보는 신은 더 그랬다. 달빛을 받으며 병실에 앉아있는데, 진짜 외로움이 느껴지면서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도 있었다. 탈옥도, 여하진을 향한 분노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서연의 유골함을 훔쳐 달아나는 장면은 소화하기 힘들었다. 대본을 숙지하고 촬영장에 가면서도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머릿속에는 그려지지만 쉽게 표현할 수 없었다. 촬영은 마쳤지만 집중하기까지 어려운 시간이 계속됐다. 유골함을 가져간다는 발상 자체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끔찍한 스토킹의 결말은 식물인간이었다. 막연히 ‘죽지 않을까’ 상상했지만, 만일 죽게 된다면 문성호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죽음 혹은 교도소행 둘 중 하나의 결말일 거라 예상했는데, 식물인간이라니 정말 허를 찌르는 결말이라며 작가를 향한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배우로 15년.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배우의 길에 접어들었지만, 그는 점차 자신의 길을, 색깔을 넓히고 있다. 그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길을 잃었던 적도 많다. 나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어 감사하다”라고 겸손한 답을 내놨다. 썩 좋은 길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길을 걷고 있다는 확신이 선다는 주석태. 그럼에도 아직 자신의 연기에 확신을 가지지는 않노라, 더 열심히 공부하겠노라 다짐한다. 

 

‘그 남자의 기억법’ 역시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연기하면서 항상 드는 의문은 ‘진짜 이렇게 행동하고 말했을까’하는 거다. “의문을 항상 던지는 편”이라고 답하는 그는 “빠르면 며칠, 늦으면 1년 정도 지나서 답을 찾는다”고 말했다. 연기가 조금씩 발전할 수 있는 이유가 ‘의문’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슬기로운 감빵생활’ 염반장을 연기하면서도 그랬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염반장으로 3, 4, 5부쯤 출연했고, 그 이후에는 후반부에 재등장했어요. 2년이 훌쩍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아쉬운 부분이 많죠. 한 인물이어야 하는데 후반부엔 다른 인물이 되어 있더라고요. 실제 촬영도 두 달쯤 후에 진행됐어요. (극 중 시간의 흐름은 그렇지 않은데) 한 작품 안에 두 인물을 연기했다는 생각에 실수했구나 싶었죠.”

 

실제 성격을 묻자 주석태는 “혼자 있으면 말을 잘 안 한다. 움직이는 것도 싫어하고, 한정적인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 외향적이 되고 싶은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설명했다. 사람들을 웃기고 싶은 마음은 큰지만 표현은 잘 못 한다. 문성호와 정반대의 성격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물었다. 자신과 전혀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느냐고.

 

“어렵다기보단 갈망은 생기죠. 나를 닮아있는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어요. 악역을 하면 할수록 가렵지 않은 다리를 긁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웃음) 제 연기를 보는 지인들은 항상 이야기하죠. 왜 다른 사람만 연기하냐고. 왜 네 연기를 못 하느냐고요. 저는 되게 감성적인 걸 좋아하거든요. 영화를 보면서 눈물도 잘 흘리고 애완동물도 좋아해요. 감성이 맞는다는 생각을 한 인물은 있어요. 영화 ‘약속’의 공상두(박신양)요. 하지만 배우란 언제나 선택받는 입장이거든요.”

 

무명 시절의 외로움 때문일까. 그는 여전히 바쁘게 살아가는 게 좋다고 답한다. 그래서 차기작도 빠르게 선택하는 편이다. 악역 외의 선택지를 묻자 그는 “진짜 소시민의 삶을 연기해보고 싶다”고 했다.

 

“예를 들면 하루하루 힘든 삶을 사는 소상공인이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현실적인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어요. 자녀의 성장을 함께하며 스트레스도 받고 다독여주기도 하는 부모이자 가장의 책임감도 좋아요. 시청자는 연기를 보고 배우를 판단하니까 제가 틀린 연기만 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지금처럼 믿어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jgy9322@sportsworldi.com

 

사진=탄엔터테인먼트 제공

<스포츠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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