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풍경소리] 절세미인 '왕소군' 의 최후

세계사를 다 둘러보아도 절세미인들은 평안치 않았다. 영웅은 미녀를 좋아하는 법인지 권력 안에 있는 영웅 주변에서 사랑은 받을지언정 권모술수가 날뛰는 바닥이니 위기를 품은 폭풍전야의 밤과 같은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중국 4대 미녀의 한 사람인 왕소군도 그 최후는 자못 가슴 아프다. 나머지 세 미인은 춘추시대 월나라의 미녀로 오나라 왕 부차에게 보내져 결국 오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 서시 삼국지에 나오는 장수인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한 미인 초선이나, 당나라 현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당나라 국정을 어지럽히고 결국 안록산의 난을 초래하는 데 영향을 끼친 양귀비 모두 그 최후는 비참하였다.

그러나 이들 미녀들 중에 왕소군은 격이 달랐다. 그녀는 평생을 궁에 있어도 궁중화가에게 뇌물을 바치지 못하는 이상 황제 얼굴 한 번 못보고 늙어갈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오랑캐의 왕에게 시집가는 것을 자원했다 한다. 결국 그녀는 흉노의 왕의 아내로 간택이 되어 시집을 가게 되었지만 성품이 곱고 인정이 많았다 한다. 그녀는 흉노의 백성들을 아끼며 화목하게 지냈으며 천 짜는 기술과 옷 만드는 기술과 농업기술들을 가르쳐 줘서 흉노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왕소군이 낳은 아들과 딸들도 한나라와 흉노간의 우의를 위해 힘을 아끼지 않아 그녀가 시집간 이후로 60여 년 동안 양국 간엔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흉노의 왕 선우가 왕소군을 ‘영호(寧胡) 알씨’로 책봉한 이유를 알겠다. 이는 그녀가 시집와서 흉노에게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주었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알려져 있으니 미와 덕을 갖춘 미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인은 박명이라 했던가? 시집 간 2년 후 왕이자 남편이었던 호한야가 세상을 떠나면서 흉노의 법도에 따라 왕소군은 다시 호한야의 장남이자 새로 즉위한 복주루(復株累)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이 때 왕소군은 원제가 승하한 후 천자에 오른 한나라 성제에게 남편의 아들에게 시집가는 것은 법도가 아니니 이 명령을 거두어달라고 청하지만 오히려 한성제는 “오랑캐의 풍속에 따르라(從胡俗)”고 칙령을 내렸다. 이 짧은 세 글자는 왕소군을 절망시킨다. 11년 후 야속하게도 두 번째 남편도 먼저 세상을 떠난다. 그녀는 다시 새로운 선우에게 시집가도록 명령을 받는다. 두 번째 남편인 북주루의 장남이자 첫 번째 남편이었던 호한야의 손자였다. 왕소군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한창 나이인 33세에 결국 음독자살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 어느 미인들보다도 왕소군은 중국인들의 가슴에 비장한 아픔을 남겨주고 있다. 나라를 위험에 빠뜨린 경국지색들과는 달랐던 것이다. 아름다움과 덕성을 함께 갖췄건만 운명은 그녀를 가만히 놔두질 않은 것이다. 워낙 옛 사람들은 평균수명이 길지를 못했다. 게다가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권력의 크기에 비례해 권력투쟁으로 늘 불안에 시달려야 했고 잦은 전쟁은 심신에 큰 후유증을 남겼다.

왕소군의 사주명조에 분명 일부종사가 어려운 기운도 있었을 거라는 팔자적인 추론도 가하지만 최고 권력자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 그만큼 험난하고 굴곡이 심한 것이다. 바람풍파가 몇 갑절로 심한 환경에서 평범한 아녀자의 행복은 애초에 기대할 수 없었으리라. 이것이 세상사의 소치인 것을. ★김상회의 풍경소리(02-533-8877)에서는 부산 및 지방 애독자들을 위해 전화 상담을 진행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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